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끈이 있다고 생각한다.
길이도 다르고, 굵기도 다르고, 꼬이는 정도도 모두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끈을 어영부영 부여잡고 상대의 끈을 향해 조금씩 걸어간다.
걷다가 걷다가
꼬임을 겪기도 하고, 약간의 끊어지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몇 번의 만남을 가지고 몇 번의 헤어짐을 거치면
상대와의 보이지 않는 끈의
실체가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은 끈의 끊어짐을 두려워한다.
그와 맞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혼자됨이 두려워, 무엇과 연결되지 않음이 두려워
억지로 묶으려고 아등바등 산다.
joan miro, hope of a condemned man
정말 어렸을 때에는 난 그랬다.
정저지와
학교라는 협소한 사회 속에서 이상을 좇았고,
실망의 여유도 없이
맞지 않는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좋은 척을 해야 했었다.
나의 이런 생각들을
나를 향해 누군가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다.
누군가를 향한 사회의 잣대를 멀리 넘어 볼 때에면
스스로 수긍하는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것이 마냥 허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회적 압박에 설득돼 가는 줏대 없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혼자있는 공간 속에서는
내 언어에, 나의 행동에 누군가 고통받고 있진 않았을까 자책했다.
변화는 없었다.
항상 생각에서 끝났고, 항상 부끄러웠다.
그러다 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분은 시인 윤동주에 관해 꽤나 비판적인 분이셨다.
대학 시절 선배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하셨다.
‘윤동주가 이육사와 같이 적극적 독립운동 행보를 보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항적 시를 강렬하게 쓴 것도 아닌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좋아할까요?’
그러자 이런 선배의 답변을 들으셨다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진 않아요.’
그리하여 나는
혼자 고통받고, 수치스러우며, 부끄러웠던 껍질을 벗어낼 수 있었다.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나의 트리거가 되어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고,
되려 인위적이었던 내 관계의 무게를 덜어내고 싶었다.
인간 관계를 끈으로 형상화시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스스로의 관계에 미숙한 내가 이를 완전히 알아가긴 어려웠다.
앞으로도 새로운 문턱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끈이 어떤 방향을 나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키를 쥐고 있는 나를 믿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