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25

나는 종종 결점 없이 고고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

사람들도 그렇게 말해주었지, 나는 차갑고 단단한 사람 같다고.

그러던 어느날 Y 언니와의 대화로 생각이 생각을 키우고, 나를 한정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

내가 원하던 건 그게 아니였을지도 모르는데, 하울링이 심한 마이크로 나는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지. 그런 사람이라고.

사실은 속도가 달랐을 뿐인데. 사람들을 끌어안아주기 위해서 다른 방식의 속도와 모양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녀는 내게 괜찮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첫번째 사람이었어.

묵묵히 내려놓은 몇개의 문장들이 나를 발가벗긴 듯한 기분이 들더라.

그녀가 해준 떡볶이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이상한, 정말 이상한 토요일 오전이었지.

101225

우린 어렸고 돈이 없었어. 그치만 비참하지 않았지.

구할 수 있는 에어비앤비 중 가장 저렴했던 코리아 타운의 작은 방이 우리 기숙사보다 크다며 웃었고

다음날 본 벌레에도 우리는 즐거웠어. 하루에 인당 20달러짜리 숙소에 감탄하며 우리는 4일만 있는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공항에 너희들을 픽업을 한 뒤 함께 프랭크 오션 노래를 들으며 본 석양과 바람은 그 어떤 공기보다 상쾌하고 아름다웠어.

어쩌다 구한 기아 K5는 우리에게 럭셔리카였어. 반만 열리는 천장 창에도, 사장님 몰래 긁어먹은 자국도

우리만의 비밀과 들킬까 긴장되던 순간들. 면접 볼때마냥 삐쭉 삐쭉 긴장되던 내 속사정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강한척을 했었어. 말보루 라이트를 같이 피고, 차 문을 열어놓고 투팍 노래를 틀고,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유를 만끽했어.

차가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어른 흉내를 내면서 그 위세를 빌려, 용기를 얻어 스스로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춤을 췄지.

삐죽삐죽한 나라는 사람도 편안해질 수 있다는 사실 알게 해준 사람들.

나의 나약함도, 부끄러움도, 내려놓고 나를 품어준 사람들.

혼자만의 공간을 주장하던 나도, 잘 맞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런게 마냥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지.

어쩌면 나는 지금껏 나의 공간을 존중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 것 뿐이었을까?

물론 양쪽의 말 많은 두 친구들 사이에서 운전하는 건 쉽지 않았어. 중국 하드락을 좋아하는 R의 노래 취향도, 반대로 운전하는데 지루한 노래를 튼 T 사이에서, 조수석 앉겠다고 다투던 이들.

사랑할 수 밖에 없었어.

항상 T는 전화 끝에 Love you를 남기곤 해. 아직 어색하지만 나도 노력해보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너희들을 생각하면 혼자서도 피식 웃음이 나와.

나도 많이 사랑하고 있어.

100925

로스엔젤레스에 오기 며칠 전, T와 함께하는 코칭 세션이 있었어.

팔로 알토의 병원에 들렀다 나는 30분 늦게 들어왔었지.

다소 심각한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던 차, 건너편의 나와 비슷하게 평상시 도도하다고 생각하던 A가 가족 이야기를 꺼내더군.

그녀도 어쩌면 나처럼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거 아닐까?

스스로를 지키고자, 세상으로부터 나 제법 괜찮다고, 봐달라고 물 밑에서 발버둥치는 도도한 백조처럼.

그곳에서 우리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어. 어떤 가치가 나에게 중요한지 말하고 그걸 다음 1주일간 실천해보자고 다짐하는 시간이었지.

T는 바로 사랑이라고 대답했어. 곧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행을 가는데, 많은 사랑으로 품고 싶다고.

이미 세가지 가치를 써 내려놓고도 나는 주저했어.

Control, creativity, impact

사실은 썩 당기지 않았을 수도, 사실은 그냥 익숙함에 젖어 평소에 내가 추구한다고 믿던 것들을 골랐을지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같아.

그리고 나는 고민 끝에 creativity 를 골랐어.

나는 창의적인 걸 할때,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고, 한동안 까먹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다양한 것들을 관찰하고 내걸로 만들고 싶다고.

A는 Success를 골랐던 거 같아.

뜨끔했던 거 같아. 나도 사실은, 깊은 마음속에는 그걸 고르고도 싶었거든.

위선적인 나였을까?

내심 단번에 love를 고른 T가 부러워졌어.

나는 그러지 못했는데.

101725

1394 브루클린

사람들 참 술 좋아하더라. 한국 사회의 술자리 위계질서를 직접 보는게 제법 재밌었어.

우리는 나이도, 직급도, 배경도 모두 달랐어. 물론 내가 제일 어렸지만, 한국인이라는 공통점 하나밖에 없었고.

C님 나파의 와이너리에서 가져온 와인은 정말 맛있었어.

붉어진 얼굴로

20대, 40대, 50대의 여자 셋이 모여 여자로서 겪는 고충들을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어.

그러곤 꿈에 대해서, 미국까지 와서 우리가 꾸는 꿈들에 대해서.

나는 얼마전 LA 렌트카 사장님 P가 보여준 조건없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P에게,

개인주의와 이기심이 넘치는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단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내가 원하는 것, 이루고 싶은 것들에만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했었어요.

항상 멀리 보기 위해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앞의 생에 집중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어떻게 살아야 멀리 내다볼 수 있을까요?

근데 당신을 보면서 마음을 차곡차곡 모으면 멀리 내다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주는 마음이 경치를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한테 소중한 걸 내어줄 각오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돌려받지 않고 사라질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먼 미래의 제가 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저도 고작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줘서 고맙습니다.

- P에게 마지막 날 남긴 편지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의 이야기,

사랑을 많이 경험하면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를 깨닫게 돼,

확장하는 사랑의 힘에 대해서..

언니들은 반짝이는 눈으로 끝까지 들어줬어.

어린 내가 하는 문장 하나 하나를 꾹꾹 눌러담아 들어준다는 느낌을 받았어.

너무 감사하더라고. 그러곤 순간의 감동이 어떻게 사람을 바꾸는지에 대해서, 그 가치를 지켜나갔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해주셨어.

진실로 멋있더라.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어. 나이, 직급, 라벨을 떼고 모두를 존중과 사랑으로 품을 줄 아는 어른으로 크고 싶었어.

사소한 걸 잡아내서 칭찬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도. 나보다 너무 큰 사람들 같았어.

또, 속도가 다른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는데, 이렇게 말해주시더라.

해인님 이야기를 듣고, 사람마다 속도가 다름을 인지하는 큰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아, 나는 이해받음에 만족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타인에게도 같은 관점과 잣대로 품어주려는 시야를 지닌 사람도 있구나..

사실은 정말 놀랐어.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어.

지긋한 다래끼가 지난 한달간 나를 괴롭혔어.

샌프란시스코로 다시 돌아가는 비행기 타기 10분 전 화장실에 잠깐 들렀는데 드디어 피가, 고름이 터졌어.

조금씩 나오긴 했지만 고름이 나오고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행복했어.

못봐줄정도로 험악하게 생긴 눈이었지만, 애기들이 무섭게 쳐다봤지만, 나는 그래도 뿌듯했어.

드디어 지리한 고름이 터져 나왔다는 사실에, 삭힌 감정들과 묵은 고민들이 조금씩, 천천히 해소되고 있다는 생각에.

C님이 이런 얘기를 했었어.

해인님 현재를 살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지독하게 현재를 살고 싶었고 살고 있었던 거였어.

충동적으로 세상을 느끼고 싶었어. LA도, 뉴욕도, 일찍 비행기표를 계획해서 끊었다면 분명 싸게 왔겠지.

근데 그랬더라면, 계획과 순서로 내 앞날을 지워냈더라면, 다가올지 모르는 무작위한 미래를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이 내게 있었을까? 이제껏 인생의 계획과 순서 없이 주어진 작은 실마리들을 발견하고 움켜쥘 때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기회들이 찾아왔던 거 같아. 내가 그날, 계획에 맞춰 친구들과 같이 늦게 LA에 도착했더라면, 렌트카 사장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를 뉴욕의 언니들과 나눌 수 있었을까?

있잖아 나는,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현재의 선택을 사랑하는 것 같아. 그래야 후회가 없거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거든.

위험을 감수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지금은 좀 찌질하고 내가 작아보기도 해, 애써 위세를 빌려 큰 척 하고 싶을때도 정말 많다?

근데 내가 갈망하는 것은 단순히 큰 이름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

큰 사랑을 하고 싶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큰 사랑을 주고 싶었다는 것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101925